1억 인구·젊은 소비층·수입의존 구조로 의료기기 수요 증가
● 케이메디허브 – 글로벌 통상환경 변화에 따른 전략적 시장 다각화
케이메디허브
대구경북첨단의료산업진흥재단
이사장
최근 미국 정부의 통상정책으로 세계가 들썩이고 있다. 지난 1월 20일 미국 제47대 대통령으로 임명된 도널드 트럼프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 MAGA)’를 슬로건으로 내세우며 제조업 부흥과 무역적자 축소를 핵심 과제로 삼았다. 그리고 자국 산업보호를 명분으로 주요 수입품목에 고율 관세 부과는 물론 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 방침을 잇달아 예고했다.
지난 7월 우리나라 정부는 주요 수출품목을 둘러싸고 미국과 본격적인 관세 협상에 들어갔다. 이어 8월에는 정상회담을 진행하며 신속하게 대미 통상전략을 조정했다. 이처럼 미국의 통상정책에 민감하게 대응하는 나라는 우리뿐만이 아니다. 세계 각국의 정상들도 촉각을 곤두세우며 실시간으로 대응책을 마련하고 있다.
미국의 통상정책 변화가 불러온 불확실성은 전 세계 기업에 기존 미국 중심 시장에서 벗어나 신흥국으로 시장 다각화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다시금 일깨워주고 있다.
베트남 하노이에서 새로운 기회를 포착하다
지난 7월 10일, ‘2025 베트남 K 의료기기 전시회(2025 K Med Expo & Hanoi Int’l Meditech Show)’에 참가하기 위해 오랜만에 베트남을 찾았다.
오송첨단의료산업진흥재단에서 근무할 때 지역발전 논의차 출장길에 오른 게 2017년이었으니 8년 만에 다시 밟은 베트남 땅이었다. 4시간 반 비행 끝에 도착한 하노이는 기억 속 모습과 달리 활력으로 가득 차 있었다. 고층빌딩과 쭉 뻗은 도로는 동남아시아의 새로운 허브로 성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듯했다.
전시회장 풍경도 크게 달라졌다. 과거 의료 인프라가 열악해 기본 수요를 충족하기에 급급했던 베트남이었지만, 전시회 현장에는 첨단의료기기가 즐비했고 바이어들도 이런 첨단제품에 뜨거운 관심을 보였다. 재단 공동관 부스에 참가한 기업들도 바이어와 상담을 통해 구매계약을 추진하는 등 새로운 수출판로를 개척하는 성과를 거뒀다.
전시회에서 만난 현지 규제당국 관계자도 “베트남인의 체질에 맞는 의료제품이 필요하다. 한국과 공동연구를 통해 맞춤형 의료제품을 개발하고 싶다”며 적극적인 러브콜을 보내왔다. 베트남에서 새로운 기회를 실감한 순간이었다.
젊은 국가 베트남, 성장엔진을 장착하다
베트남은 우리나라 의료기기 기업에게도 매력적인 시장임이 틀림없다. 1억명을 돌파한 인구는 베트남 시장의 가장 큰 강점이다. 특히, 평균연령은 30대 초반으로 매우 젊어 앞으로 헬스케어에 대한 관심과 소비 여력이 빠르게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급격한 도시화와 중산층 증가로 양질의 의료서비스에 대한 수요가 확대하고 있다는 점도 긍정적이다.
베트남 의료기기산업은 수입 의존도가 높다. 현지에서 생산하는 의료기기 비율은 전체의 10%에 불과하고, 이마저도 단순 소모품 위주다. 이 때문에 고품질의 한국산 의료기기는 베트남에서 충분히 경쟁력 있는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진단, 영상, 치과 등 다양한 분야에서 우리나라 기업의 기술력이 빛을 발할 수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베트남 정부는 지난 2022년, 한국을 의료기기 신속허가 제도 적용국가에 포함했다. 이는 우리나라 기업이 현지 시장에 더 빠르고, 효율적으로 진출할 수 있는 제도적 발판이 마련되었음을 의미한다.
재단도 베트남 네트워크 확장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전시회 기간 ‘한-베 생체시료 기반 국제 공동세미나’를 개최해 베트남 연구진과 국제 공동연구 방안을 논의했다. 하노이 약학대학(Hanoi University of Pharmacy)과 업무협약을 체결하며 인력교류도 준비했다. 특히, 하노이 약학대학은 베트남 유일의 약학 전문대학으로 베트남 전역에서 뛰어난 인재가 모이기 때문에 인력교류는 양국 의료산업 협력 확대의 실마리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세상은 넓고 시장은 많다
비단 베트남만이 답은 아니다. 다양한 국가가 저마다의 이유로 매력적인 시장이 될 수 있다. 몇 가지 사례를 들자면, 브라질은 라틴 아메리카 최대 헬스케어 시장으로 공공 및 민간 의료 부문이 함께 성장하고 있어 고가의 첨단 영상진단 및 수술장비에 대한 수요가 높다. 특히 팬데믹 이후 디지털헬스케어 솔루션 도입에 적극적이기 때문에 관련 분야의 우리나라 기업들이 진출을 모색할 수 있다.
인도네시아는 세계 4위의 인구 대국으로 국민건강보험 제도 확대로 인해 접근성이 뛰어나고 비용 효율적인 진단기기 및 소모품 시장도 크게 확대되고 있다. 이를 통해 이동식 초음파 의료기기나 저가형 진단장비 등 제품군을 보유한 기업이 새로운 기회를 창출할 수 있다.
아랍에미리트(United Arab Emirates, UAE) 역시 중동 및 북아프리카 지역의 의료 허브로 부상하고 있다. 대규모 자본을 바탕으로 한 인프라 투자와 의료관광 육성정책 덕분에 최첨단 의료시설이 빠르게 확충되고 있어 고성능 의료기기에 대한 수요가 높다. 특히, 성형외과, 피부과 등 미용 의료 분야는 눈에 띄게 성장하고 있다.
전략적 선택으로 새로운 길을 개척하다
새로운 시장을 발견하고 개척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국가마다 다른 인허가 절차와 현지 기업과의 경쟁, 그리고 문화적 차이와 같은 진입장벽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략적 선택’이 있다면 새로운 시장에 도전할 만하다. 목표국가의 인허가 제도를 충분히 이해하고 현지 규제에 맞춘 제품개발 전략을 세우는 것과 현지 유통망·병원·학계와 파트너십을 구축해 신뢰를 확보하는 것, 문화·소비 패턴을 고려해 제품을 현지화하고 마케팅 전략을 병행하는 것도 방법이다.
일례로, K-뷰티 기업들은 동남아시아 시장 진출 과정에서 현지인의 피부 특성과 생활습관을 철저히 분석하고 제품을 현지화함으로써 큰 성공을 거둔 바 있다. 이런 전략은 미용산업뿐만 아니라 의료기기산업에도 적용될 수 있다.
결국, 글로벌 시장에서 기업이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건 단순한 기술 경쟁력이 아니라 “현지의 특성을 깊이 이해하고 어떤 전략적 선택을 하느냐”인 것이다.
미국 시장은 여전히 세계 최대 규모의 중요한 시장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글로벌 통상환경의 불확실성이 커진 지금, 기존 시장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고 새로운 시장을 탐색해야 할 시점이다. 베트남은 물론 브라질, 인도네시아, UAE와 같은 신흥국들은 우리나라 의료기기산업의 차세대 성장동력이 될 잠재력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
이제는 불확실성 속에서 기회를 발견하고, 전략적 선택으로 길을 개척하는 용기가 필요한 때다. 그것이야말로 우리나라 의료기기산업의 지속가능한 성장의 필요조건이고 우리가 함께 고민할 과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