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중문화 속의 의료기기 이야기 - 8회

■ 대중문화 속의 의료기기 이야기 - 8회

여자의 변신은 무죄? 필립스의 변신도 무죄! (Part 1.)

▲ 임 수 섭
LSM 인증 교육원 대표
/여주대학교 교수

'여자의 변신은 무죄!'. 지금 보면 시대착오적인 이 문장은 '여자와 커피는 부드러워야 좋은 것 아니에요?'라는 문구와 더불어 80~90년대를 풍미한 유명한 광고 카피다. 여자의 변신에 유, 무죄 따지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거지만, 한 가지 확실한 점은 그 변신이 그 전, 후의 극명한 차이 혹은 파격을 함의하기 때문에 기존 패러다임을 파괴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음은 분명하다.

우리나라 화장품 광고에 대한 패러다임도 그러하다. 국내 화장품 광고의 효시는 1922년 일간지의 '박가분' 광고였다. 이 광고에서 여성은 한복을 입은 단아한 현모양처의 이미지였다. 그러다가 실물모델이 등장한 것은 1930년대로 전설적인 무용가 최승희가 대표적인 경우다. 이후 국산 브랜드의 최초 실물 모델은 1956년 태평양화학공업사(현 아모레퍼시픽)가 내세운 영화배우 김보애다. 이때부터 화장품 광고는 제품명을 제시하고 특성을 나열하는 과거의 방식에서 탈피하여 모델을 통한 이미지 구축에 집중하게 된다.

그렇게 변화된 화장품 광고는 1970년대 컬러 신문과 1980년대 컬러TV 시대의 개막과 함께 색조화장품을 중심으로 대중화 된다. 이 시기에 한혜숙, 정윤희, 유지인, 장미희, 윤정희 등 전통적인 미인 관점에 부합하는 빼어난 미모를 가진 여성이 광고 모델이 되었다. 1980년대 중반에 들어서는 브랜드별로 전속 모델을 내세워 특정 브랜드에는 특정 모델이라는 개념을 적용시키기 시작했는데, 특정 모델에 특정 화장품을 각인시켜 누적효과를 얻어내는 마케팅이 시작된 것이다. 금보라, 황신혜, 이혜숙 등이 이 시기의 대표적인 모델이었다.

이러한 화장품 광고 트렌드의 급격한 변화가 이뤄진 시기는 1990년대다. 기존의 예쁜 얼굴에 치우친 모델이 아닌 개성까지 겸비한 모델로 화장품 모델의 제1조건이 넘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조건에 해당됐던 탁구선수 현정화, 트렌스젠더 하리수, 중성적 이미지의 신은경, 김지호 등과 더불어 화장품 광고의 패러다임을 바꾼 모델이 바로 이영애다.

지금은 대장금으로 더 알려진 그녀이지만, 그 전의 가장 대표적인 그녀의 이미지는 '산소 같은 여자(feat. 영화처럼 사는 여자)'였다. 당시 그녀는 20대 중반에서 30대 초반 여성을 타깃으로 새롭게 런칭한 '마몽드' 브랜드의 초대 모델이자, 장수 모델로 활약하면서 해당 화장품뿐만 아니라, 그녀의 인지도까지 급격하게 끌어올렸다. 이 화장품 광고에서 그녀는 우아하고 단아한 전형적인 미인의 모습이 아니라, 폴로와 검도를 즐기고 오픈카와 SUV를 직접 운전하는 당찬 커리어우먼(그것도 최소 실장급 이상의 직위를 가진!), 응급실 의사, 형사 그리고 오지 탐험가 등 당시의 전통적인 여성상을 깨뜨리는 강렬하고 파격적인 콘셉트의 광고로 화장품 광고 트렌드의 변화를 주도했다. 이러한 트렌드는 조금 더 세련되고 정제된 형태로 진화했을 뿐, 큰 줄기는 거의 비슷하게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의료기기 기업 중에서도 큰 규모에 맞지 않게 파격적인 변신과 혁신으로 늘 선두 자리를 놓치지 않은 기업이 있으니 바로 필립스다. 1891년에 네덜란드 아인트호벤에서 탄소 필라멘트와 전구를 제조하면서 설립된 필립스는 120년 역사를 자랑하는 유럽의 대표 기업이다. 특히 영상과 음향 분야의 명가로서 카세트테이프, CD(Compact Disc), LD(Laser Disc), 블루레이와 같은 세계적인 기술표준을 단독 또는 유수의 기업들과 협력해서 발명 및 표준화 시켰고, 평면 TV와 디스플레이에서도 일가견을 보였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서 삼성, LG, 일본 기업 등에 밀리면서 첫 번째 변신을 하게 되는데 회사의 설립 기반이자, 중추 분야에 해당되는 TV 등의 일반가전부분, 디스플레이와 반도체 사업을 매각한 것이다. 이와 함께 회사명에서 'Electronics'라는 단어까지 삭제함으로써 필립스의 변신은 이제 시작임을 예고했다. 더 나아가 또 다른 심벌이자, 주력 사업인 조명 사업부문과 음향 사업부문까지 법인을 분리하거나 지분을 매각함으로써 두 번째 변신을 하는데, 이로써 필립스는 삼중날 면도기, 전동칫솔, 스팀다리미, 에어프라이어, 커피 메이커 등 고급 가전으로서 이미지가 확고한 '소비자 라이프 스타일 가전 사업', 필립스의 새로운 먹거리로 떠오른 '디자인 사업' 그리고 '의료기기 사업' 등으로 간결하게 바뀐다.

여기서 필립스의 결정적인 변신이 뒤따르니 본격적인 헬스케어 전문 기업으로 변신이다. 즉, 건강한 생활에서부터 질병의 예방, 진단과 치료, 가정 내 관리에 이르는 헬스케어 전 과정에서 다양한 솔루션을 제공하는 기업(Health Continuum)임을 선언하고 회사의 모든 포트폴리오를 이에 맞게 정렬함으로써 기업 창립부터 2000년대 초까지 100년 넘게 필립스에서 서자 취급 받던 의료기기 사업부문을 가문의 흥망성세를 좌지우지 할 유일 계승자로 올려놓았다.

이러한 필립스의 의료기기 분야의 라이벌은 지멘스와 GE이다. 이들은 19세기부터 21세기 초반까지 전기, 전자, 전구 분야에서 대결을 벌였듯이, 의료영상분야에서도 90년 이상 경쟁했다. 이러한 세 회사의 관계는 어쩌면 삼국지 관계로 비유될 지도 모르겠다. 회사 크기와 매출이 가장 크고 금융, 중공업까지 아우르는 가장 광범위한 사업 범위를 가지고 있는 GE가 '위(魏)', 상대적으로 가장 규모가 작은 필립스가 '촉(蜀)', 이 둘 사이의 중간 규모를 가진 지멘스가 '오(吳)'라고 말이다. 다만, 2000년대 후반 이후 금융, 일반가전 등 GE의 주력 사업이 매각 되거나 무너지고 GE의 사세가 급격히 악화 되면서 이러한 비유는 적절하지 않게 되었지만, 분명 2000년대 초까지 무려 30년 이상 이러한 구도는 유효했었다.

이는 의료기기 사업부문에서도 고스란히 이어져 시장 점유율과 매출액의 순서도 대개 'GE>지멘스>필립스' 순이었다. 이러한 구도는 2000년대 중반에 넘어오면서 깨지게 되는데, 우리나라의 경우가 극적이다. 당시 필립스는 심혈관과 뇌혈관 수술에 쓰이는 혈관조영엑스선촬영장치(Angio 시스템)에서 선두에 있었고, GE는 MRI, 지멘스는 CT에서 비슷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문제는 시장 규모나 파급력 측면에서 소수의 심혈관/뇌혈관 의료전문가에 국한된 Angio 시스템이 광범위한 진단 영역을 지닌 MRI와 CT에 비해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이로 인해 필립스가 아무리 Angio 시스템 시장을 석권해도 3사 중 수위에 설 수가 없었다. 이로 인한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필립스의 반격이 2000년대 중반부터 시작되는데 다음 편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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