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기술평가, 기술 진화에 맞춰 유연해져야”

강혜영 학회장, “KAHTA, 산업계와 함께하는 열린 논의의 장”

2025-04-09     의료기기뉴스라인

● 한국보건의료기술평가학회(KAHTA) 강혜영 학회장 인터뷰

디지털 헬스기기, 인공지능 기반 진단기기 등 의료기술의 발전 속도가 빨라지면서, 이를 뒷받침할 보건의료기술평가(HTA) 제도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새로운 기술이 임상 현장에 적절히 도입되기 위해서는 과학적 근거에 기반한 평가뿐 아니라, 제도의 유연성과 적시성 또한 함께 요구된다.
이에 본지는 한국보건의료기술평가학회(KAHTA) 강혜영 회장을 만나 의료기기 HTA 제도의 현황과 개선 방향, 산업계와의 소통 방안, 국제적 흐름에 대해 폭넓은 이야기를 나눴다. <편집자 주>
강 혜 영
한국보건의료기술평가학회장
연세대학교 약학대학
교수

“보건의료기술평가는 단순히 기술을 걸러내는 과정이 아니다. 산업계·의료계·정부·환자 등 다양한 이해당사자가 함께 고민하고 조정해 나가는 ‘열린 논의의 장’이 돼야 한다”
강혜영 한국보건의료기술평가학회(KAHTA) 회장은 ‘보건의료기술평가(HTA)’라는 제도가 지닌 본질적 가치를 강조하며 이같이 말했다. 2006년 설립된 KAHTA는 내년이면 20주년을 맞이한다. 강 회장은 설립 초기부터 활동해 온 창립 멤버로서, 현재는 학회장으로 학회의 중장기 전략을 이끌고 있다. 그는 “학회는 의학적·경제적 근거에 기반한 기술평가 방법론을 연구하고, 정책 개선을 위해 이해관계자 간의 중립적 토론의 장을 마련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제도는 넓고 복잡하다, 국내 현실 반영한 유연한 적용 필요
강 회장은 “국내 의료기기 분야 보건의료기술평가 제도는 안전성과 효과성 중심의 허가 체계, 건강보험 등재 및 사후관리 제도를 포함해 상당히 잘 구축돼 있다”고 평가했다. 식약처의 허가 절차를 통해 제품의 안전성과 효과성이 확보되고, 건강보험 등재를 통해 환자의 재정적 접근성이 좋아지며, 이후에는 실사용 중 발생하는 정보를 기반으로 한 사후 모니터링 체계까지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그는, “해외 제도를 국내에 도입할 때 우리나라의 의료현실과 환자 접근성, 시장 규모 등 고유한 특성을 반영하지 않으면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고 지적했다. 각 나라에는 제도 도입의 배경과 특수성이 있으며, 국내 보건의료 환경과 사회적 조건에 맞춘 제도 운용이 중요하다는 설명이다.
또한, “의료기기는 제품 생애주기가 짧고 기술 진보가 빠른 만큼, 기존 제도에 이런 ‘속도감’을 반영할 수 있는 체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포괄수가제(DRG)와 같이 미리 행위에 대한 비용을 정해놓는 제도의 경우, 새로운 기술이 등장했음에도 행정적 절차나 제도 유연성 부족으로 인해 수가가 제때 반영되지 않으면 현장의 수요와 정책 간 간극이 발생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산업계와 학계, 아젠다 발굴 함께해야
보건의료기술평가 제도의 발전을 위해 산업계와 학계가 협력해야 하며, 학회는 그 중간에서 연결고리 역할을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강 회장은 “정부와 직접 소통이 어렵다면, 학회라는 열린 공간을 활용해 아젠다를 발굴하고 공개적으로 함께 논의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조언했다.
그러면서 KAHTA는 이번 회장단부터 도입한 ‘기관 세션’이라는 제도를 소개했다. 이는 학회에 기관회원으로 가입한 정부 기관이나 기업, 단체가 학술대회에서 다루고 싶은 주제를 제안하고, 발표자·토론자를 구성해 학술대회 내 공식 세션으로 개최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둔 제도이다. 강 회장은 “이 제도를 통해 산업계도 제도 개선에 대한 논의의 장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을 것”이라며, “의료기기산업협회나 산업계 종사자들도 기관 회원으로 적극 참여해 제도 개선에 필요한 논의를 이끌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새로운 기술, 새로운 평가 틀 필요
의료 현장에는 이미 다양한 혁신기술이 도입되고 있다. 디지털헬스, AI 기반 진단기기, 맞춤형 치료제 등은 기존 평가 방식에 새로운 접근이 필요한 기술들이다. 이에 대해 강 회장은 “치료 패러다임이 바뀔 때마다 임상적 유용성, 비용 효과성 등의 평가 기준은 유지하되, 구체적인 평가 방식은 기술에 맞게 유연하게 조정돼야 한다. 이를 뒷받침할 제도 역시 계속 보완돼야 한다”고 진단했다.
특히 희귀난치성 질환 치료에 사용되는 ‘원샷’ 치료제나 맞춤형 의료기기 등의 사례를 언급하며, 전통적인 무작위 임상시험(Randomized Controlled Trial)이 어렵거나 윤리적 제약이 큰 상황에서는 실사용 데이터를 중심으로 한 사후 평가와 보완적 증거 수집 방식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와 관련해 ‘실사용 데이터(RWD)’에 대한 국제적 관심도 커지고 있다. 과거에는 관찰연구로 간주해 임상시험 대비 내적 타당도가 낮다고 평가된 RWD가, 최근에는 외부 비교군 설정이나 통계적 보정기법을 통해 충분한 신뢰도를 확보할 수 있는 방법론이 개발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 FDA나 유럽의약품청(EMA)에서도 RWD를 정식 평가자료로 인정하는 제도적 변화가 진행 중이며, 우리나라 역시 관련 제도 개선이 이뤄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RWD는 궁극적으로 ‘현장에서 나온 데이터’이기 때문에, 분석 범위가 넓고 실제 환자군에 기반한다는 점에서 큰 장점이 있다. 강 회장은 “빅데이터, 인공지능 등의 기술 발전과 맞물려 평가 환경도 점차 변화하고 있다”며, “산업계와 학계, 정부가 함께 새로운 방법론과 평가 틀을 구축해야 한다”고 말했다.

의료기기 산업계에 전하는 메시지
인터뷰를 마치며 강 회장은 의료기기산업계에 당부의 말을 전했다. 그는 “평가 제도는 기술 발전과 별개로 존재하지 않는다”며, “산업계가 제도의 수동적 수용자에 머무르지 않고, 필요한 제도적 개선 방향과 데이터를 제시하고 논의의 장에 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어, 학회가 마련한 공식적인 논의 구조를 활용한다면 산업계와 학계가 함께 문제를 풀어가는 기반이 마련될 수 있다고 기대감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