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기기산업과 협력이 절실히 필요한 이유: 영상의학”
해외 산업ㆍ학회 협력 활발, 국내 의료기기 개발 이후 학회의 기업지원 부족 ‘반성’
● 제17회 의료기기의 날을 기념하며
대한영상의학회 총무이사
분당서울대학교병원 교수
과거에는 의학을 내과와 외과로 크게 나눌 수 있었지만, 현대의학은 전문화를 통해 세분화되면서 매우 많은 영역으로 발전해 왔다. 대부분의 의학 분야가 정확한 시작 시점을 알기 어려운 것과 달리, 영상의학은 예외적이다. 1895년 11월 8일 독일 물리학자 뢴트겐이 X선을 발견한 날이 바로 영상의학의 시작이었기에 이날을 ‘세계 영상의학의 날’로 지정, 기념하고 있다. 영상의학은 과학기술에 기반한 분야로, 의료기기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의료영역이다.
X선 발견일, ‘세계영상의학의 날’
인체를 절개하지 않고 내부를 확인하는 것은 의학의 오랜 꿈이었다. 과거에는 많은 경우 시험적 개복술과 같은 외과 수술로 내부를 직접 열어보고 진단해야 했지만, 영상의학에서 다루는 X선, 초음파, CT, MRI 등 다양한 물리적 기술을 활용해 절개 없이 내부를 직접 영상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되면서 현대 의료의 가장 기반이 되는 필수 분야가 됐다. 진단의 시작에서부터 적절한 치료를 위한 계획 제시, 치료효과 평가, 재발 여부 확인에 이르기까지 의료의 거의 모든 단계에 영상의학이 활용되고 있으며, 내과와 외과를 가리지 않고 대부분의 의료 영역에서 사용되고 있다. 특히 인터벤션영상의학 분야가 발전하면서 혈관이나 장기에 구멍을 내고 수술을 대체하는 최소침습적 시술, 종양을 태우거나 얼리는 소작술 등 치료 영역에서도 눈부신 발전을 이루고 있다.
국내 영상의학을 이끌어 온 대한영상의학회는 1945년 해방 이후 창립됐다. 1951년 전문의 제도가 시작되면서 인정받은 10개 기본과목 중 하나였다. 이후 초음파, CT, MRI 등 신기술 도입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해 왔으며, 매년 대한의학회에서 수여하는 최우수학회상을 수상하는 등 모범적인 학회로 자리매김했다. 국제적으로도 한국 영상의학의 수준은 매우 높아, 세계 3대 영상의학 학술대회 중 하나인 북미영상의학회(RSNA)에서 발표한 논문 수가 단일 국가로는 전 세계 3위권에 달하는 등 믿기 어려울 정도의 성과를 보이고 있다. 이런 결과는 한국의 의료 수준이 전 세계 최고 수준에 달했고, 연구자들의 노력과 더불어 최신 의료기기를 활용해 앞선 기술로 연구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영상의학 의료기기시장의 성장
영상의학 관련 의료기기산업 역시 가장 큰 단일 규모를 자랑한다. 2022년 기준 세계 영상의학 의료기기 시장 규모는 약 760억 달러(약 100조 원)에 달했고, 향후 연평균 18.76%의 높은 성장세가 예상돼 2030년에는 약 411조원 규모에 이를 것으로 전망되는 큰 시장이다. 관련 산업에는 전통적인 영상장비 제조업체뿐만 아니라 최근 급속히 발전하고 있는 인공지능 기반 소프트웨어 서비스 업체들도 영상의학 분야에 활발하게 진출하고 있다. 또한 방사선동위원소 기술의 발달로 진단과 치료를 동시에 수행하는 방사성의약품이 개발되고 있으며, 영상의학 관련 조영제, 카테터 등의 소모품 시장 역시 매년 급성장하고 있다. PACS를 비롯한 EMR 등 정보인프라 시스템과 원격의료, 연구 및 교육 지원 등의 서비스산업도 영상의학 관련 의료기기산업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영상의학은 특성상 많은 부분이 B2B 비즈니스 영역이어서 다국적 글로벌 기업들이 선점하고 있지만, 로컬라이제이션과 커스터마이징에 있어서는 약점을 보이기 때문에 국내 기업들도 이를 잘 활용한다면 충분한 경쟁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과거 초음파 분야에서 국내 1호 벤처기업이었던 메디슨(현 삼성메디슨)은 국내 영상의학과 의사들 및 병원과의 적극적인 협력을 통해 초음파 영역에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할 수 있었다. 현재도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다양한 사용자들의 수요를 적극적으로 반영해 임상적 유용성을 입증해 나가며 글로벌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기업 내부의 기술연구와 엄격한 제조과정뿐 아니라, 다양한 임상시험을 통해 제품의 우수성을 증명하고 질병 진단과 환자 진료에 실제로 유용함을 보여주는 의료진과의 지속적인 협력이 필수적이다.
국산 MRI 개발 역사를 돌아보면 아쉬운 점이 있다. 1980년대 중반 금성사에서 MRI 시제품을 개발해 서울대학교병원에 납품, 임상적용을 시도했으나 충분한 시장이 형성되지 않아 지속하기 어려웠다. 이후 1990년대 중반에도 여러 업체에서 국산 MRI 개발을 시도했지만, 외환위기 등 여러 사정으로 인해 중단되는 아픈 역사가 있었다. 반면 일본 도시바 (현 캐논메디컬)는 과거부터 자체 MRI를 생산해왔고, 최근에는 중국 기업들도 임상에서 경쟁력 있는 MRI, CT 제품을 내놓으며 국내 시장에도 진출하고 있어, 영상의학과 의사 입장에서는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필자는 최근 일본 요코하마에서 열린 일본영상의학회(JRC) 학술대회에 참석했는데, 그곳에서 영상의학 관련 기기 업체들만의 협회인 JIRA(Japan Medical Imaging and Radiological Systems Industries Association)의 활동을 목격하고 큰 반성의 계기가 됐다. 1967년 설립된 JIRA는 현재 209개 일본 국내 영상의학 관련 기업들을 아우르는 협회이다. 세계 3대 영상의학학술대회인 북미 RSNA, 유럽 ECR에 이어 참가자 및 논문 수 기준으로 세 번째로 큰 규모를 자랑하는 대한영상의학회 학술대회(KCR)와 달리, JRC는 대부분 일본어로 진행되는 자국 행사임에도 불구하고 산업계 기술전시 규모는 ECR를 넘어서 RSNA의 약 1/3 수준에 달할 정도로 엄청났다. 물론 이는 오랜 제조업 역량에 기인한 것이겠지만, 학계와 산업계의 긴밀한 협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학회 기간 중에는 각국 영상의학과 대표들을 위한 VIP 기술투어도 마련돼 있었고, 일본 유수 기업 CEO들을 직접 만나 기술적 질문을 나누고 국가 간 협력 방안을 논의할 수 있었다. 이를 일본영상의학회회장이 주선한다는 사실에서, 그동안 우리 대한영상의학회가 학문적 성과에만 치중하고 의료기기 산업계와의 상생에 소홀했음을 절감할 수 있었다.
의학계의 의료기기개발 협력 필요
국내에도 초음파, X-선 등 분야에서 세계적 경쟁력을 가진 기업들이 다수 있고, 특히 인공지능 기반 영상판독 솔루션 분야에서는 국내 기업들의 최고 수준의 기술력이 여러 논문을 통해 입증된 바 있다. 하지만 이런 기업들이 국내 건강보험 체계 등 의료환경의 특수성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 것도 사실이다. 이들 기술은 대부분 국내 영상의학과 의사 및 병원과의 협력을 통해 개발됐다. 하지만 개발 이후에는 기업 차원에서만 시장개척에 나섰을 뿐 학계 차원의 지원은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에 대한영상의학회는 이번 2024년 KCR에서 방문하는 미국, 유럽을 포함한 20여 개국 국제학회장 및 VIP들과 국내 기업 간 교류를 주선해 기업 홍보를 적극 지원할 계획이다. 이는 기업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기술 기반 분야인 영상의학은 우수한 기업이 없다면 경쟁력을 잃을 수밖에 없기에 반드시 수행해야 할 필수과제이기도 하다. 앞으로도 대한영상의학회는 학문 발전에 주력하는 것은 물론, 국내 영상의학 관련 산업 육성을 위해서도 더욱 노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