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InnerView_이경분 서울대학교병원 병리과 교수

서울대병원은 2018년 7월 슬라이드 스캐너 2대를 도입하면서 병리의사들이 디지털 병리시스템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디지털 병리시스템 도입 후 어떠한 점이 달라졌을까. "병리의사가 디지털 병리로 하고 싶은 첫 번째 요소가 자문이다. 스캐너가 있는 기관에서는 병리의사 간 서로 자문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희귀질환은 발생률이 적다 보니 병리의사가 단독으로 진단하기 어려운 사례가 많아 경험 많은 의사에게 자문할 때가 적지 않다"

염색된 조직 또는 세포 검체를 유리슬라이드 위에 얹어 광학현미경으로 판독·분석하는 아날로그 방식의 병리과(Pathology) 업무가 '디지털 병리'로 진화하고 있다. 디지털 병리는스캐너를 사용해 유리 슬라이드를 디지털 영상으로 획득한 후 이를 진단·분석·관리·저장하는 과정을 ‘디지털화’ 함으로써 병리업무 효율성과 진단 정확도를 향상시킬 수 있다. 하지만 일부 상급종합병원을 제외한 병원들의 디지털 병리 도입은 지지부진한 실정이다.

고가의 슬라이드 스캐너 도입과 솔루션·서버 구축에 많은 예산이 소요되지만 병원의 비용보전을 위한 수가가 없다 보니 좀처럼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것. 디지털 병리 도입은 '진단의 마지막이자 치료의 시작'을 결정짓는 병리과 임상업무 전반의 워크플로우 개선과 환자 안전성을 높이는 현실적 대안으로서 더 이상 선택의 문제가 아닌 필수적인 과제로 인식되고 있다.

특히 아날로그 병리업무의 디지털전환을 선포하며 앞서 디지털 병리시스템을 구축한 서울대학교병원 사례는 병원들의 디지털 병리 도입에 대한 국가적 관심과 정책 지원이 왜 필요한지 그 효용성과 당위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경분 서울대학교병원 병리과 교수는 기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서울대병원의 디지털 병리 도입 과정부터 임상현장에서의 유효성 및 발전 방향에 대해 설명했다. 국내에서 디지털 병리 개념이 정립된 시점은 대략 2019년. 서울대병원은 이보다 앞서 2017년 도입 계획을 수립하고 예산 작업을 거쳐 2018년 디지털 병리시스템을 오픈했다.

2018년 당시는 세계적으로도 디지털 병리를 시행하는 병원이 2~3곳에 불과했다. 더욱이 국내 도입 선례가 전무한 상황에서 서울대병원이 큰 시행착오 없이 디지털 병리시스템을 순조롭게 구축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경분 교수는 "디지털 병리 도입 후 전자의무기록(EMR)시스템·의료영상저장전송시스템(PACS) 개선 작업을 진행하면 오랜 시간이 소요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그렇지만 서울대병원은 이미 2016년 병원정보화시스템(HIS)을 한 차례 업그레이드하면서 병리업무를 병리정보화시스템(LIS)으로 처리하는 등 상당 부분 디지털화가 이뤄진 상태였기 때문에 디지털 병리 도입 과정에서의 시간을 크게 단축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서울대병원이 디지털 병리를 선제적으로 도입한 이유는 연구와 환자 진단 과정에서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병리 데이터의 디지털화가 향후 인공지능(AI)·빅데이터·딥러닝 등 기술과 접목돼 더 많은 질병 분석과 정확한 진단을 견인할 것으로 내다봤다.

이 교수는 "서울대병원은 국립대병원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많은 연구가 이뤄진다. 병리분야는 종양학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데, 병리의사가 연구하는 것보다 임상의가 병리를 기반으로 연구하는 경우가 많다"며 "과거에는 유리 슬라이드로 많은 연구가 이뤄졌는데 디지털화가 안 되다 보니 원하는 자료를 찾기 어려워 연구 접근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환자 진단 측면에서도 도입 필요성이 있었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환자의 과거 슬라이드를 판독하는 것은 진단의 매우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유리 슬라이드가 많이 사용됐다. 하지만 디지털화가 안 된 자료가 많아질수록 진단 효율성이 떨어지는 한계가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전에도 이미지 분석 기술은 있었지만 급격히 발전하는 AI 알고리즘이나 기계학습을 활용한 병리진단이 이뤄진다면 더 많은 분석과 정확한 진단이 가능할 것으로 판단해 디지털 병리를 선제적으로 도입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서울대병원은 2018년 7월 슬라이드 스캐너 2대를 도입하면서 병리의사들이 디지털 병리시스템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디지털 병리시스템 도입 후 어떠한 점이 달라졌을까. 이 교수는 먼저 장소 부분을 언급했다. 기존에는 의대 연구실·병리과·수술실로 유리 슬라이드가 계속 이동하면서 많은 시간이 소요된 반면 디지털 병리 솔루션을 활용하면서 필요한 케이스를 현미경이 없는 곳에서도 모니터를 통해 언제 어디서든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시공간 제약이 사라져 병리진단 접근성이 크게 높아졌다.

한층 정확한 분석도 가능해졌다. 과거에는 병리과 의사가 눈으로 보고 정성적으로 평가했다면 디지털 병리를 활용해 더욱 객관적인 숫자로 판독이 이뤄졌다. 디지털 병리는 병리의사 간 또는 병리의사와 임상의 간 환자 진단에 필요한 자문과 협진이 활발해지는 토대 또한 제공했다.

이경분 교수는 "병리의사가 디지털병리로 하고 싶은 첫 번째 요소가 자문이다. 스캐너가 있는 기관에서는 병리의사 간 서로 자문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희귀질환은 발생률이 적다 보니 병리의사가 단독으로 진단하기 어려운 사례가 많아 경험 많은 의사에게 자문을 구할 때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

2018년 디지털 병리시스템 도입 '병리업무 개선', '연구·진단 효율성 향상'

그는 "과거에는 병리의사가 서로 자문을 구하기 위해 유리 슬라이드 배송으로 인한 부수적인 업무가 생기고, 또 중간에 진단이 중단되기도 했지만 현재는 스캐너만 있으면 공유 플랫폼에 환자 병리데이터를 업로드 해 여러 병리의사들의 자문이 가능해졌다"고 덧붙였다.

병리의사와 임상의 간 협진과 자문도 훨씬 수월해졌다. 병리과 전문의는 임상의를 위한 의사라는 말이 있듯이 임상과 의사로부터 질환에 대한 질문을 받거나 다학제 진료를 위한 집담회를 많이 한다. 서울대병원이 디지털 병리를 앞서 도입한 이유 중 하나도 연간 400~500회에 달하는 집담회를 효율적으로 진행하기 위함이었다.

이 교수는 "디지털 병리 도입 후 병리과 의료진들은 원내 어디서든 데이터를 확인하고, 임상의들도 병리 데이터에 접근이 가능해 병리의사와 임상의 간 협진·자문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디지털 병리 데이터는 병리의사만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임상의들이 모두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한지점이다. 기존에는 병리의사만 유리슬라이드를 볼 수 있었고 다른 임상의가 현미경을 별도로 구매하지 않는 이상 확인이 불가능했다"며 "디지털 병리는 누구나 병리 영상이 필요하면 볼 수있고 연구에도 활용할 수 있는 것이 큰 장점"이라고 강조했다.

디지털 병리는 환자 입장에서도 장점이 있다. 환자 간 검체가 바뀌는 일은 극히 드물게 발생하지만 진단과 치료에 있어 심각한 영향을 줄 수 있다. 따라서 디지털 병리는 업무 자체를 디지털화함으로써 수동(manual work)로 할 때보다 검체가 바뀌거나 오염되는 사례를 확연히 줄여 환자 안전에 도움이 된다. 현재 기술적으로 가능하지만 법적 근거와 보안 문제 때문에 실현되지 못하고 있는 병원 간 디지털 병리데이터 공유가 현실화되면 환자 편의성도 크게 확대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경분 교수는 "환자가 타 병원으로 전원 시 유리 슬라이드를 가지고 가야하는데, 이 과정에서 적어도 4번 이상 병원에 방문해야 한다"며 "법적으로 디지털 병리 데이터 공유가 가능해지면 환자의 불편함을 크게 줄일 수 것"이라고 밝혔다.

이 교수는 "단순히 판독하는 차원에서는 디지털 병리 이미지가 유리 슬라이드를 대체할 수 있지만 조직 검사 가운데 단백질 혹은 유전자 검사의 경우 최소 한 번은 실물 조직이 있어야 한다"며 "정밀·맞춤의학이 발전하면서 추가 및 부속 검사가 많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환자들이 편리하게 슬라이드를 가져갈 수 있을지에 대한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서울대병원 사례, 디지털 병리 도입 확대 도움 될 것"
병리진단에 필수적인 조직·세포 검체 유리 슬라이드와 파라핀 블록은 진단의 최종산물인 동시에 진단 근거로서 의무기록과 같은 자료로 취급된다. 특히 병리검사가 많은 병원일수록 유리 슬라이드 보관·관리·재검색에 더 많은 인력 투입과 공간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병원들이 유리 슬라이드를 보관·관리하는데 물리적 임계점에 봉착했다는 점이다. 반면 디지털 병리는 시공간에 구애받지 않는 검체의 온전한 보전뿐 아니라 전문의 간 다학제 진료와 자문을 효율적으로 수행해 정확한 진단과 치료결과 향상에 도움이 된다. 이러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국내 병원들의 디지털 병리 도입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가장 큰 원인은 비용 문제다. 고가의 스캐너 구입과 솔루션·서버 구축에 많은 예산이 소요되지만 병원의 비용보전을 위한 재정적 지원, 즉 ‘수가’가 없다는 점이다. 이경분 교수 또한 가장 큰 걸림돌로 비용 문제를 꼽았다. 다만 근본적인 이유는 병원마다 디지털 병리 도입에 대한 필요성에 차이가 있기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 교수는 "아무래도 비용 문제가 제일 크다"며 "하지만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비용은 어떻게든 만든다. 병원마다 필요성에 대한 니즈가 다른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서울대병원처럼 중증질환 등 복합적인 환자들이 많은 경우 병리 의존도가 매우 높다. 또 정밀의료·맞춤치료는 병원에서 행하는 진료행위의 첨단성과도 직결된다"며 "1차 진료라 할 수 있는 초기진료를 하는 병원과 복합 진단을 하는 병원은 디지털 병리에 대한 니즈가 다르다. 즉, 바라보는 시선이 다르기 때문에 필요성과 비용 사이에서 저울질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서울대병원은 2018년 디지털 병리 도입 초기 병리검사의 약 30%만 디지털 스캔이 이뤄졌지만 2019년 스캐너 4대를 추가 도입한 데 이어 점진적으로 양을 늘려 지난해 11월부터 유리 슬라이드를 100% 스캔하고 있다.

디지털 병리 활용이 병리업무 효율성을 높이고 병리의사 또는 임상의 간 협진·자문을 통한 환자 진단과 치료에 있어 임상적 유효성을 검증했기 때문이다.

이 교수는 "지금은 초기 투자비용이 문제가 되지만 언젠가는 모든 병원이 디지털 병리를 도입할 것으로 생각한다. 다만 병원의 디지털 병리 활용이 환자의 진단·치료결과 향상 등 임상적 가치가 충분하다는 점이 입증될 때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내다봤다.

특히 서울대병원을 중심으로 디지털병리의 임상적 가치를 입증하기 위한 연구가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서울대병원은 서울아산병원 삼성서울병원 가톨릭대서울성모병원과 함께 한국보건의료연구원(NECA)에서 진행하는 환자 진단용 공유 플랫폼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이는 임상현장에서 환자 진료에 디지털 병리가 어떻게 활용되는지 근거 자료를 수집하고 병원 간 데이터 공유플랫폼을 구축함으로써 향후 디지털 병리진단 표준화를 이끄는 것은 물론 장기적인 관점에서 디지털 병리 수가 산정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서울대병원은 또한 디지털병리연구 사업단을 중심으로 분당서울대병원 서울시보라매병원과 함께 병리진단에 AI기술 적용을 위한 '인공지능 훈련용 플랫폼'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해당 연구는 각 병원 임상자료와 공과대학의 IT 및 뷰어 기술을 통해 학습용 자료를 공유함으로써 병리 소프트웨어 개발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경분 교수는 "의료 AI 기술과 소프트웨어가 병리 분야에서 환자 진단 등에 활용되기 위해서는 빅데이터를 쌓아야 하는데, 그 핵심에 디지털 병리가 있다"며 "병원에서 디지털 병리를 단순히 작은 기술로 사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디지털화·플랫폼화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일부 병원에서만 병리업무를 디지털화해서는 플랫폼을 통한 데이터 공유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전체 병원으로의 디지털 병리 도입 확대가 선행돼야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디지털 병리 수가는 매우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특히 "서울대병원이 선제적으로 디지털 병리시스템을 구축해 기본적인 병리업무를 포함한 연구·분석·진단 등 모든 영역에서 디지털 병리를 활용하는 이유는 국내에 선례가 없기 때문"이라며 "연간 7만 건 이상 병리진단이 이뤄지는 서울대병원에서의 사용 경험을 통해 이미지 용량, 운영 및 유지비용 등 각종 데이터가 쌓이면 타병원과의 공유가 가능해 디지털 병리도입 활성화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정희석 라포르시안 취재부장

*The InnerView는 'Inner'(내밀한, 내면의)와 'View'(관점, 세심히 살펴보다)의 합성어로 의료기기업계, 학계, 병원, 정부기관 등 각계각층 다양한 관계자와의 심층 인터뷰를 통해 국내 의료기기 혁신 생태계 조성과 산업 발전을 모색하고자 기획됐습니다. The InnerView는 의료전문지 라포르시안 정희석 취재부장이 진행합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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