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료기기 세평 - 박기택 청년의사 부국장

■ 의료기기 세평 - 박기택 청년의사 부국장

포스트코로나 시대, '관망 모드'를 끄자

▲박기택
청년의사 부국장

십수년 전만 해도, 의료기관 등에서 사용되고, 개발되던 헬스케어 관련 제품들은 제약과 의료기기, 이 두 큰 축을 벗어나지 않았다. 물론, 합성화학의약품, 바이오의약품, 영상 장비, 치료재료 등 제조법이나 원료, 용처 등에 따라 분류하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의약품'(병을 치료하는 데 쓰는 약품)과 '의료기기'(병원에서 병을 치료하는 데 사용하는 기구와 기계)의 사전적 정의를 벗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사용되고 개발되는 헬스케어 제품들 중에는 의약품과 의료기기로 똑 부러지게 나누기 애매한 경우가 적잖다. 당장 약이 아닌 약, '디지털치료제'만 해도 그렇다. 명칭만으론 제약산업 범주에 포함돼야 할 것 같지만, 실상은 의료기기산업에 더 가깝다. 그렇다고 디지털치료제가 의료기기의 사전적 정의에 부합하지도 않지만 말이다. 물론 현재도 제약, 의료기기 두 분야가 헬스케어산업의 두 축이라는 점에는 이견은 없다. 그러나 과거처럼 헬스케어 산업의 대부분이라고 치부할 수 없는 상황임은 분명하다.

앞서 언급한 디지털치료제로 확인할 수 있듯, 최근 헬스케어산업은 파괴적이면서도 급속한 변화가 광범위하게 이뤄지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특히 기존 의료기기산업에 (긍정적이던 부정적이던) 영향을 미칠 게 자명하다.

그럼, 이런 변화의 흐름을 전통의 국내 의료기기업체들은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업체들 중에는 기술의 발달에 따른 시대적 흐름이라고만 치부하고 '관망'하는 자세를 보이는 곳도 있지 않을까 싶다. 아무리 기술이 발전해도 기존의 수술 등 의료의 근간은 바뀌지 않고, 그와 관련된 전통적(?) 제품들의 위상에도 변화의 여지는 많지 않을 것이라고 자위하면서 말이다.

일견 이러한 전망이 수긍되는 면도 있다. 생명, 건강과 직결되는 헬스케어산업은 변화에 빠르게 대처하기에 앞서 돌다리를 두드리듯 안전을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혁신적 의약품이나 의료기기라도 실제 임상에서 쓰이기까지 수년이 소요되는 경우가 허다한 사례가 이를 대변한다. 이런 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본 이들이 관망하는 자세를 보이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을 터다.

문제는 더 이상 관망을 허용치 않는 변수가 발생했다는 점이다. 전 세계를 강타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이 바로 그것이다. 지난 2년 여 간 코로나19로 인한 많은 변화가 일어났지만 '위드 코로나',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는 이러한 변화가 한층 더 넓고 빠르게 전개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특히 의료기기산업 관련해 그간 지지부진하던 기술 도입, 정책 환경 등의 변화가 물살을 탈 가능성이 크다. 이달 열린 국정 감사에서 코로나19 대응을 위해 한시 허용된 비대면 진료가 국민 편익을 위해 지속돼야 한다는 요구들이 이어진 것이 그 단적인 예다. 그간 의료계 등의 반대로 지지부진했던 ‘원격 의료 시스템’ 도입은 코로나19로 인해 반대 목소리가 힘을 잃으면서 ‘원격’ 모니터링, 진료 등과 관련된 다양한 제품들의 실제 임상에 확대 도입 시기가 한층 앞당겨졌다. 이러한 원격 시스템의 도입 여파는 직접적인 IT 관련 헬스케어 제품이나 모니터링 관련 분야에만 국한되지 않을 것이다. 코로나19로 세간의 관심은 물론 정부 지원까지 등에 업은 체외진단산업과 일상적 건강관리가 뿌리내리는데 일조하고 있는 스마트 헬스케어, 빠르게 발전하는 인공지능‧빅데이터 활용 기술 등과 어우러져 다양한 의료기기산업의 변화를 촉진시킬 것이다.

최근 덴마크 코펜하겐 대학(University of Copenhagen)의 과학자들이 코로나19 환자의 호흡기나 집중 치료에 대한 필요성을 계산하는 인공지능 기반 컴퓨터 모델을 개발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연구팀은 여러 임상 소스에서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활용해 코로나19 환자들의 데이터에서 패턴을 발견, 가장 심각하게 영향을 받는 환자들 사이에서 공통된 특징들을 찾아내기 위한 연구를 진행 중이다. 이 연구에 약간의 상상력만 가미해도, 치료의 필요성과 영향에 대한 모니터링이 비단 코로나19에만 그치지 않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심장이나 간 등 감염성 질환이 아닌 환자들에 대한 수술 필요성 등을 계산하고, 심장 스텐트 시술 시 환자에게 어떤 스텐트가 적합한지, 환자 몸속의 인공관절의 수명은 얼마나 남았는지 등을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데이터화하는 현실을 말이다. 이 중 일부는 이미 이뤄지고 있는 현실이기도 하다.

이러한 예측 가능함은 기존 제품들에 대한 적나라한 품질 비교까지도 가능하게 만들 것이다. 지금까지는 특정 의료기기를 삽입해 수술을 받은 환자들에게 해당 의료기기가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확인하기 어려웠다. 해당 환자의 일상생활 패턴, 유전적 특성 등 변수가 워낙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공지능과 빅데이터는 이러한 변수를 최소화 한 데이터 생성을 가능하게 만들 것이고, 이렇게 쌓인 데이터는 소비자(의사)들의 선택은 물론, 정부의 정책적 판단(예컨대 보험급여 삭감 내지는 가격 결정 등)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런 전망은 기자의 짧은 깜냥이 아닌, 의료계와 산업계 안팎에서 일찍부터 제기돼 온 바다. 실제로 이미 이런 변화를 일찍부터 예측하고 대비한 나선 의료기기업체들의 모습도 국내 안팎에서 쉬이 찾아볼 수 있다. 오픈 이노베이션을 도입 확대한다거나, IT 기업이나 소프트웨어업체 등과 합종연횡하는 일련의 모습들처럼 말이다. 이들의 행보를 주시하되, 관망만 해서는 안된다. 포스트코로나 시대의 변화는 IT 등에만 국한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덧붙이면, 가까운 시기 '위드 코로나'가 실현되면 당장은 코로나19 사태 재현을 막기 위한 감염병 관련 제품, 시스템 개발 등에 정책 초점과 지원이 맞춰질 것은 불 보듯 뻔하다. 의료기기산업 육성책이란 이름으로 말이다. 이는 되레 산업 내 불균형을 초래할 수 있다. 의료기기산업은 특정 분야만으로 성장하기 어려운 생태계를 가지고 있다. 이를 고려한 정부의 전향적이고 세밀한 규제 개선과 지원책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저작권자 © 의료기기뉴스라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