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영로 교수, 의료기기산업을 말하다⑪

■ 윤영로 교수, 의료기기산업을 말하다⑪

"원주, 무에서 유를 만든 의료기기산업 기반"

▲ 윤 영 로
연세대 보건과학대학
의공학부교수

코로나 사태는 위기 즉 위험이기도 하지만 준비하는 자에게는 기회이다.

국내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는 안정세를 찾았다가, 초기와는 달리 비록 적은 숫자이지만 다시금 확진자가 늘어났다. 코로나 사태 해결도 중요하지만 세계 경제 동향 변화와 사회적 거리두기를 통한 비대면 회의, 비대면 강의, 비대면 진료 등 삶의 패턴이 달라짐에 따라, 포스트 코로나에 대해 많은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전 IMF 외환위기로 모든 분야가 힘든 시기를 겪을 때 강원도 원주의료기기 산업은 '위기는 위험과 기회'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다. 코로나19는 위기이지만 또한 준비된 자에게는 기회라 생각한다. 지난 두 번 기고 서두에도 코로나19 관련 내용을 다루었듯이 이번에도 시작 전에 한 달간 본인이 듣고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코로나19 사태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필자는 지난 한달 사이에 의료기기 RA 교육과 관련해 한국화학융합시험연구원을 다녀왔고, 5월 13일에는 대전에 있는 KAIST 바이오 및 뇌공학과 요청으로 학부, 석사 및 박사과정 100여명 학생들에게 강의를 했다. 또한 5월 19일 진대제 전 정통부 장관이 주관해 올해로 16회를 거듭하고 있는 진대제 최고경영자과정(AMP) 재학생‧졸업생들을 위한 '2020 Chin's Academy Day'에 참석을 했다. 주제는 'Corona19, 희망봉 있다. (Before Corona After Corona)' 오찬을 포함해 공식 진행시간은 오후 12시부터 5시였지만 6시까지 장장 7시간 동안 모두가 마스크를 쓰고 너무도 진지한 모습으로 강의를 들었다. 세계 경제가 어려운 요즘과 같은 시기에 회사 운영에 바쁘실 CEO들이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이번 사태에 대해 뭔가 정보를 얻기 위해 참석을 했을 것이다.

진대제 전 장관과의 오랜 인연으로 참석한 AMP

보통 10월에 개최해 오던 것을 코로나19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사회적 거리두기 진행 중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행사를 개최한다는 것은 쉽지가 않은 일이다. 만약 코로나19로 인해 자가 격리에 들어가게 되면 비대면 강의도 못하고 또한 기업들의 민원을 해결하기 위해 식약처에 가는 것도 문제가 될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가능한 최소한의 모임에 참석하고 있었으나 진대제 전 장관의 인연과 행사의 중요성을 알고 고민 끝에 참석을 했다. 진대제 이사장의 Key-note 스피치에 이어 이남식 서울예술대학교 총장의 '무엇이 위기인가(진단)'와 다음소프트 부사장이신 송길영 박사의 '한국 저력 있다(분석 및 방안)', 최영해 전 4차산업혁명위원회 전지원단장의 모두 발언에 이은 100분 토론이 이어졌다.

진대제 이사장은 기업 CEO, 노무현 정권 시절 최장수 정통부 장관과 현재 스카이레이크 인베스트먼트를 운영하시는 다양한 경험에서 나온 key-note 스피치는 꽤나 인상적이었다. 몇 내용은 발췌해 보면 93년 아시아 외환위기, 2008년도 글로벌 금융위기 그리고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을 예로 드시면서 '글로벌 경제 위기는 역사를 통해 되풀이 되는 자연스러운 현상', '위기 발생 자체는 통제 불가능' 그러나 '기업 위기 극복의 필수조건은 리질리언스(Resilience)'라 강조했다. 리질리언스는 탄력, 탄성, 병・불행으로 부터의 신속한 회복력이라는 의미이다. 이와 함께 코로나19가 가져올 신 3D 시대 △실물경제와 금융의 괴리(Decoupling) △탈세계화(Deglobalization) △디지털화(Digitalization)를 언급했다.

혁신에는 반드시 고통이 뒤따라

각각의 내용이 꽤나 중요하고 절실한 과제라 생각한다. 구체적인 것을 다 언급할 수 없지만 탈 중국으로 공급망 다변화, 4차산업혁명 가속화와 비대면 경제로 인한 비대면 산업 등 우리나라 의료기기 업계에게 중요한 내용들이 많았다. 진대제 이사장은 글로벌 현상에 따른 국내적 현상과 대응 그리고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기본에 충실하고 유연하고 발 빠른 혁신적 기업문화의 필요'를 강조했다. 혁신이란 말은 쉬우나, 어려운 말이다. 한자로는 가죽 혁(革)에 새로울 신(新). 가죽을 새롭게 한다는 뜻이다. 즉 고통이 수반되는 것이다. 영어로는 innovation. In(inside)+nov(new)+at(=make)+ion(=suffix) 즉 '안에서 새로운 것을 계속 쌓아서 보다 나은 것을 창조하여 간다'는 뜻이다. IMF 금융 위기보다도 어렵다는 요즘 시기에 회사 구성원들의 헌신을 강요하기보다는 CEO 자신부터 자기희생의 진정한 변화의 혁신이 필요하지 않나 싶다.

이남식 총장은 3개 대학의 총장을 역임하고 4번째로 한국예술대학 총장을 맡고 있다. 이날 강의에서 보여준 2019년도 4월 11일 세계 항공기 운항 사진과 항공기 운항 감소로 인한 2020년 4월 16일 세계 항공기 운항 사진은 정말 심각했다. 크루즈(CRUISE)산업과 관련된 데이터 역시 심각했다. 송길영 박사가 준비한 '데이터로 본 세상의 변화' 중 'The Global Risks Report 2020 15th Edition'에서 발췌한 △Economic Risks △Environmental Risks △Geopolitical Risks △Social Risks △Technological Risks 그리고 감염병이라는 새로운 화두의 등장도 인상 깊었다.

필자는 남들과 달리 미국에서 NOVATION이라는 모뎀 회사에서 테크니션으로 사회의 첫발을 뗐다. 1년 반 후 대학원 진학을 위한 학비를 벌기 위해서였다. 1달러가 아까운 시절에 대학 동창의 권유로 1984년 친구의 은사인 진 장관의 스탠포드 대학 졸업식에 참석하고 일주일간 여행을 함께한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진 장관은 필자의 어려웠던 젊은 시절에 필자에게 미국 유명 대학의 꿈을 향한 실천을 그려 주었고,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인연이 계속돼 IT와 국내외경제에 대한 다양한 분야에서 멘토 역할을 해주셨다.

의료기기분야 AMP 있다면, 산업 발전에 분명 도움 될 것

필자는 의료기기가 다품종 소량 생산의 영세기업 형태라고 언급하기보다는 진대제AMP와 같은 의료기기 분야의 AMP를 누군가가 만들어 다양한 분야로 지식을 넓힌다면 의료기기산업은 중견기업을 넘어 대기업 형태로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국내외 석학을 모시고 앞으로 우리나라 보건산업이 어떻게 커 갈지를 논해 보는 것도 협회 차원의 일이지 않나 생각한다.

2014년 이후로 한 번도 빠지지 않겠다고 약속드리고 진대제 AMP 강의를 들으려 매주 화요일 저녁 서울-원주를 왕복했다. 해외 출장으로 이틀은 빠졌지만, 언젠가는 이런 프로그램을 우리나라 의료기기산업을 위해 개최해야겠다, 생각하던 차에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임에도 불구하고 그해 말에 산업통상자원부와 한국산업기술진흥원 지원으로 비슷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그림 1) 필자는 의료기기 CEO, 회사 임직원들이 이런 AMP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고 권장해 왔다.

기술사업화 역량강화 프로그램 2018년도 수료식
기술사업화 역량강화 프로그램 2018년도 수료식에서 연설하는 필자.

필자는 최근 코로나19와 관련한 4권의 책을 구매해 읽고 있다. 필자는 의료기기산업에 종사하시는 분들도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다. 코로나19로 인한 현재와 미래의 문제는 무엇인지 미리 대처하지 못한다면 심각한 상황에 처할 수 있다. 책 이름은 다음과 같다. '세계 석학들이 내다본 코로나 경제전쟁', '코로나19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들', '코로나 빅뱅, 뒤바뀐 미래-코로나 시대에 달라진 삶', '경제, 그리고 투자 4. 포스트 코로나-우리는 무엇을 준비할 것인가?'

필자는 12회 원고를 쓰면서 마지막으로 강원도 원주의료기기산업과 필자에 대해 쓰고자 한다. 필자가 늘 주장하는 행정은 역사다. 당시 왜 그것을 했고, 왜 못했는지 이 내용들을 알아야지 현재 상황에서 그것을 어떻게 극복해 나갈지를 분석할 수 있다고 본다. 강원도 원주 의료기기산업은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 그러나 여러 번 일부 사람들의 오판으로 직진해서 갈 수 있었던 길을 우회해 갈 수밖에 없었다. 때로는 실망과 좌절 속에 다시 일어나기도 했지만 아쉬운 점이 많이 있다. 첨단의료복합단지 미선정으로 같이했던 교수 세 분은 의공학부를 떠났다. 또한 회의에 참석하면 ‘윤영로 교수는 왜 강원도 원주의료기기산업 육성만을 언급하냐’라는 오해도 받았다. 참다가 때로는 ‘어디서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한 번이라도 그런 적을 보셨습니까?’라고 되묻기도 했다. 나중에는 ‘윤 교수 미안해요’ 라고 사과했다.

늘 필자는 국내 의료기기산업이 커야 대학도 발전하고 또한 필자가 사는 지방인 원주가 발전한다고 생각한다. 강원도 원주의료기기산업을 언급하는 이유는 원주에서 의료기기산업을 했기에 원주뿐만 아닌 강원도가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다른 지역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원주를 벤치마킹을 해서 변화했다. 필자는 가끔 생각한다. '내가 연세대 신촌 캠퍼스의 교수였다면 지금의 나의 모습이 있을까?' 남들이 보기에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좋은 것도 많았고, 말도 안 되는 오해와 근거 없이 말을 만드는 사람들 때문에 홀로 눈물을 흘리면서 이 자리를 떠나고 싶었던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힘들 때 마다 힘을 북돋아 주었던 윤일용 대양의료기기 회장님 같은 원로분들 그리고 지난 10회 기고 동안에 언급했던 많은 분들과 1957년생 동갑내기인 김정조 (주)이앤엑스 사장, 늘 같이한 벗 조현정 (주)비트 회장이 이 길을 걸어가는데 도움을 주었다.

출장가는 비행기에서 눈물을 쏟은 적도

영어를 좀 한다는 빌미로 시작된 국제 협력과 관련한 해외 출장은 다양한 것을 경험할 수 있었다. 부족한 것이 많기에 몇 년 전 기고 요청을 거절했으나 다시 '윤 교수님 아니면 누가 의료기기 역사를 정리하겠어요?'라는 한마디에 시작한 12회 기고. 해외 출장을 갈 때는 공항에서 몇 권의 책을 구매한다. 그중 하나가 원희룡 제주지사가 쓴 ‘무엇이 미친 정치를 지배하는가?’였다. 책에 언급된 첨단의료복합단지 선정과 관련 원주에 대한 이야기를 읽을 때 비행기 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그림 2)

무엇이 미친정치를 지배하는가

비행기 안에서 눈물을 흘린 적이 또 한 번 있다. 연구실 박사 과정이었던 신재우 박사와 같이 개발한 국내 최초의 귓속형 체온계가 대한항공 비행기에 구매 상품으로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다. 반대로 괴로웠던 적은 과학재단에서 받은 RRC 센터와 기업 대응 자금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해야 했던 일이다. 차마 글로 표현하기 난감한 내용이기에 궁금한 독자들은 '무엇이 정치를 미친 정치를 지배하는가?'를 구입해 읽어 보시기 바란다. 필자는 첨단의료복합단지 선정 당시 유치를 위해 대외협력국장을 지냈기에 강원도 원주를 의료기기 분야만이라도 선정해 주었다면 대한민국 의료기기산업 발전은 10년 이상 앞서 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94년 미국에서 의용전자공학과에 부임해 왔을 때는 '아시아 최초의 의용전자공학과'라는 표현을 사용했지만 상황은 열악했다. 당시 4년제 대학 중 의료기기 관련 학과가 설치된 학교로는 부산 인제대, 건국대 충주캠퍼스, 고려대 조치원캠퍼스, 연세대 원주캠퍼스 등 4군데였다. 이외에 2년제 전문대학이 있었다. 연세대의 경우 독립채산제로 재정이 분리돼 있었다. 이메일 주소 역시 지금 쓰는 yoon@yonsei.ac.kr 이 아닌 yoon@dragon.yonsei.ac.kr 이었다. 홈페이지도 eco.yonsei.ac.kr 이었으며 원주캠퍼스 교원번호는 입사 연월일이 교원 번호였다. 필자가 지금은 미래캠퍼스로 변한 원주캠퍼스 학술정보처장이 돼 강력 주장한 결과, 정보화 통합을 이뤄 비로소 신촌 캠퍼스와 같이 교수는 y 그리고 직원은 z로 시작하는 교원 번호로 변신했다. 이메일 주소도 yoon@yonsei.ac.kr로 dragon이 빠져나갔다. 정보화는 한번 잘못하면 걷잡을 수 없는 상황에 도래함을 당시 뼈저리게 느꼈다. 기존에 있는 방식과 통합하려면 중복성을 피하는 것이 쉽지가 않다는 것이다. 필자가 제안한 방법은 '신촌과 원주 교직원이 중복이 되면 원주캠퍼스 교직원이 바꾼다', '학생과 중복 시는 개개인이 학생을 설득한다'였다. 필자의 현재 이메일인 yoon@yonsei.ac.kr도 신촌캠퍼스 심리학과 학생과 중복돼 그 학생을 찾아 '누가 더 오래 이 이메일을 사용할 것이냐'는 논리로 설득하고 3년간은 그 학생에게 오던 이메일을 전달해주기도 했다. 어느 누구는 '왜 당신만 yoon이냐' 하지만 당시는 이메일이라는 개념과 교수실에 네트워크를 설치한다는 개념이 없던 시절이다. 미해군연구소에서 워크스테이션과 그에 따른 네트워크를 사용하다 왔기에 당시 전산원장을 이해시켜 설치했다.

이렇듯 분교라는 것은 1972년 대도시 인구분산 시책에서 하나의 정책 수단으로 제시되고, 그 후 1977년 입안된 수도권 인구 재배치 기본 계획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권장됐다. 1978, 79년 본교와 거리 50km 이내인 한양대 안산캠퍼스(1979년)는 수도권 그 외 지역인 연세대 원주캠퍼스(1978년), 동국대 경주캠퍼스(1979년), 건국대 충주캠퍼스(1980년) 그리고 고려대 조치원캠퍼스(1980년) 5개 대학 중에 3개 대학에 의료기기 관련 학과가 생겼다. 당시 일부 교수들의 잘못으로 독립채산제와 중복학과 문제가 대두됐다. 필자가 부임해 왔을 당시에는 대부분의 중복학과는 서울로 가는 것이 최대 기대사안이었다.

연세대와 강원도 원주시에서 만난 소중한 인연들

이런 시점에 원로교수인 윤형로 교수님이 같이 일을 해보자는 제안을 받아들여 이경중 교수님과 함께한 공기반 사업이 강원도 원주의료기기 사업의 시초라 생각한다. 당시 참여 기업은 윤형로 교수님의 전기공학과 동기이며 워크스테이션 사업을 하던 오건민 사장님이 메디게이트라는 회사를 설립해 시작했다. 또한 당시 서울만 가면 윤 교수님과 방문했던 회사가 수입 오퍼상을 했던 길문종 사장의 메디아나였다. 또한 당시 필자의 담임반이었던 (재)원주의료기기테크노밸리 박성빈 박사의 아버님이 찾아 오셔서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희사하고 싶다는 제안을 했다. 그 분은 자녀가 다니던 학교의 어려운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진정한 기독교 장로셨다. 윤 교수님과 상의하고 만남의 계기로 열악한 상황인 학생들을 위한 개방 컴퓨터실을 마련하고 PC를 설치했다. 또한 1998년 11월 과기부가 공고하고 1999년 5월 선정된 RRC지원과 같은 해에 산업자원부에서 공고를 내고 학교에서 제안서를 내어 선정된 TIC 사업을 위한 대응 공간 마련을 위해 박성빈 박사의 아버님이 7000만원을 기부했다. 또 학과장 시절 인연으로 박성규 학생의 아버님이 기숙사 보증금(당시에 한시적으로 있었음)으로 1200만원을 기부해 주셔서 당시 센터장 방과 연구실 공간을 마련했다. 지금은 학생 실험실로 사용한다.

어느 날 윤형로 교수님에게 원주시에서 산업통상부에서 TP 선정에 관한 자료요청이 있었다. 필자는 제안서를 보지 않고 자료를 낼 수 없다 하였고, 확인 결과 타 학교에서 작성한 제안서가 부실했던 점이다. 당시 원주시에서는 향후 군부대 철수 이후에 새로운 환경친화적 산업을 고민하던 중이었다. 당시 김기열 전 시장님 직속에 정책개발담당관실을 두고 지금은 국장으로 퇴임한 원민식 과장이 담당했다. 열정이 넘치는 분이었고 두 번이나 과로로 인한 뇌출혈로 아주대병원에 입원하였고, 입원할 때마다 병문안을 갔었다.

당시 큰 제안서를 써 본 적이 없었던 교수님 다섯 분과, 그리고 당시 대학원생들과 함께, (초기에는 의용전자공학과 대학원이 없어서 전자공학과 교수님들 도움으로 원주에서 전자공학과로 운영하던 시절) 원주에 있는 동서울 레스피아(당시 화승 레스피아)에 자리를 잡고 자료와 컴퓨터를 들고 들어가 밤새 교수님들은 자료에 줄을 긋고 학생들은 컴퓨터에 타이핑을 쳐, 새벽에서야 비로소 초안을 마련했다. 원주시와 같이 만든 최초의 제안서가 그렇게 탄생했다(그림 3).

원주의료전자기술연구집단화단지 제안서

하지만 결과는 한 곳 선정에서 6곳으로 지정됐고, 원주가 선정될 것이라는 말들이 많았지만 실현되지 않았다. 필자는 1977년 대학 1학년생일 때 대학 4학년 학생인 형님이 돌아가신 후로 술을 전혀 하지 않다가 비로소 원주시 공무원들과 마신 폭탄주가 필자 인생 최초의 폭탄주였다. 또한 돌아가신 형님이 이름이 고 윤형로(尹衡老)였다.

필자는 일은 개인이 똑똑하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동행하는 사람들이 마음과 행동이 같이해야 일이 된다고 생각한다. 몇 년 후에 춘천, 원주 그리고 강릉으로 분산 배치되는 강원테크노파크가 선정됐다. 미선정에 따른 실망은 엄청났다. 첫 시도이기는 했지만 남들과 달리 어떤 재정 지원 없이 교수님들과 학생들의 헌신으로 만든 제안서였기 때문이다. 잃는 것이 있으면 얻는 것이 있다고 당시 지금의 동부 프로농구단의 시초인 원주 프로농구 선정 당시, 같이 있던 원주시 공무원분들과 회식 장소에서 TV를 켜 놓고 조마조마하다 결정 소식을 듣고 환호했던 생각도 난다. 당시 원주는 뭔가 해보려 노력을 하던 시기였다. 당시 김기열 시장님은 '이왕 시작한 것, 해봅시다'하며 용단을 내리셨다.

대전 달려가 설득한 끝에 기회 얻어, 1등 차지

1955년 원주군이 원주시로 승격이 되고 1989년 원성군이 원주군으로 그리고 1995년 원주시로 합병이 되면서 흥업면에 있었던 보건소 자리(그림 4)에 의용전자공학과 교수님들이 주도로, 당시 4000억원이 안되던 원주시 재정에 10억을 투자할 테니 창업보육센터를 설립하자는 제안을 하였고, 10개의 창업 기업을 모았다.

원주테크노파크 창업보육센터

그 중 하나가 (주)메디아나였다. 기본 모토는 기업들에게 숟가락 젓가락이나 다름없는 오실로스코프 등 장비를 갖추자는 것이었고 당시 대학원생들과 교수님들이 상주하다시피 했다. 당시 박경리 문학관을 방문했던 김대중 대통령이 50억을 약속했지만 이 또한 현실화되기가 쉽지 않았다. 1999년에 과기부에서 RRC 공고를 냈다. 각 도에서 하나만 추천하는 것이었다. 이 또한 소식을 듣고 준비에 들어갔는데 하루는 윤형로 교수님이 알아본 바에 의하면 지역내 타 대학의 제안서가 강원도에 올라가 있다고 했다. 또 한 번의 실망이었다. 점심을 먹고 들어오던 대학 백운관 주차장에서 대전과학재단에 내려가 공정한 기회를 요청해 보자고 제안하고 윤 교수님과 대전으로 달려가 설명을 하니 '바로 이런 것을 해야 하지 않겠냐'고 하면서 각 도에 한 개 제출 제안이 풀렸다. 기 선정된 제안서를 요청할 수는 없지만 선정 학교를 알게 됐다. 돌아오는 차편에서 알고 있던 전자과 선후배 그리고 동기들의 전화번호를 찾아 기여코 타 대학 제안서를 받아 볼 수 있었다. 이것이 두 번째 큰 제안서였다. 당시 과학재단에서 재직하던 분들 중에는 이제 제주도에서 제2의 인생을 즐기고 있는 분도 있다. 당시는 안화영 선생님 지금은 실장이 됐고, 가끔 연락하면 과거의 결정이 지역을 살렸다는 추억담을 나눈다. 당시 30개 제안서 중에 1등을 했다.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또한 몇 개월 후에 지경부에서 기업 지원 시설을 갖추는 TIC 사업에 대한 공모가 있었지만 RRC와 중복이라고 문제가 됐다. 하나는 연구 사업이고 또 하나는 기업을 위한 장비지원사업이었기에 중복이라는 말은 탁상행정이라 생각이 들었다. 이 문제 역시 해결을 위해 설득의 노력이 있었다. 당시 강원도에서 지경부에 근무하는 공무원은 석탄 과장을 하던 이강후 과장(후에 지역 국회의원)밖에 없었다. 강원도의 한계였지만 원주 출신이며 당시 의사였던 연세대 김병수 총장님도 지경부를 설득하고 총장 공관에서 의료기기 관련 분들을 모아 만찬을 열었다. 성경에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를 실감했다. 제안서 제출 기회만을 달라고 요청해 받아들여졌고, 당시 기 선정됐던 인천대 교수인 후배에게 요청해 제안서를 받아 보고 감을 잡았다. 당시 장비를 놓을 마땅한 장소가 없었는데, 마침 학생들 서클룸을 만들 계획으로 학생회관이 증축 중이었다. 윤 교수님은 당시 강성의 총학생회장과 총학생회를 설득해 2년동안 사용을 관철시켰다. '2년 후에는 또 뭔가 있겠지'하면서도 내심 불안했다. 강원도 원주 의료기기는 원주캠퍼스 모든 학생들이 동참한 것이다. 정부는 강원도 원주의료기기 발전 모습을 보고 연구 기능인 RRC와 기업 지원 기능인 TIC를 합병해야, 시너지 효과가 일어남을 알게 되고 그 후에는 원주 모범 사례라는 명시로 RRC와 TIC는 통합이 됐다. 12번째 마지막 기고에서 못 다한 이야기를 하겠다.

키워드

#N
저작권자 © 의료기기뉴스라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