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이안 F. 맥니리, 출판사 건강미디어협동조합

거대한 규모의 의학
루돌프 비르효, 자유주의, 공중보건학

총을 들었던 의사로 대표적인 인물은 체 게바라다. 하지만 그 이전 독일의 전신 프로이센에 활동했던 루돌프 비르효 역시 사람을 살리는 의사인 동시에 1848년 독일의 3월 혁명에 총을 들고 저지선을 만들었던 인물이다.

일반인들에게 비르효는 낯설지만, 의학을 전공했다면 교과서에서 자주 접할 수 있는 낯익은 이름이다. 대표적으로 혈전의 생성 기전을 밝힌 ‘Virchow’s Triad’를 만든 학자다. 혈전이 혈관 내피를 훼손하고 이를 통해 혈류를 변화시키며 혈액 응고의 변화로 발전된다는 설명이다. 사회의학의 아버지라는 칭호와 함께 위생학 공중보건학 그리고 정부와 함께 국가 제도에 대한 제도 정비에 참여했던 실천적 학자이기도 했다.

일반인들도 이분의 업적에 대한 혜택을 보고 있다.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면 우리가 반드시 잘 익혀 먹어야 하는 돼지고기에 대한 감염 위험을 알아낸 분이다. 돼지고기는 날로 먹거나 덜 익혀 먹을 때 선모충에 의한 감염으로 병을 얻게 되며 인간과 같은 먹거리를 섭취하는 돼지에 매우 흔하게 발견되는 기생충이었다. 이 기생충의 발견으로 양질의 단백질 제공원이었던 돼지고기의 위험을 분석해 내고, 특정 온도 이상에서 익혀 먹어야 안전하다는 사실을 의학적으로 밝혀,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하게 됐다.

하지만 이 모든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의 가장 큰 학문적 성과는 질병에 대한 사회학적 접근과 환경에 대한 요인을 찾아낸 것이다. 그는 단지 학문적 접근뿐 아니라 실재 제도나 규정을 만들어 의사의 개별 치료가 주는 가치 이상의 사회적 성과를 가져 왔다.

1848년 비르효는 독일 문화부 장관의 지시로 전염병 조사를 위해 지금의 폴란드 남부 지방인 실레시아 소로우라는 마을에 부임하게 된다. 여기서 그가 본 현실은 참담하다. 열악한 식습관, 위생상태, 전염병의 매개인 해충과 더러운 식수 등…. 지금 시각으로 본다면 전염병이 없는 게 이상하겠지만, 당시 의식 수준으로 볼 때 병의 원인은 환경보다는 죄에 대한 벌의 개념이 상식적이었다. 즉, 성적 문란이나 과음 등 무질서해 보이는 삶에 대한 신의 형벌로 이해하고 있던 때였다.

세균에 대한 인식도 낮고 환경과 질병에 대한 연관도 쉽지 않던 시기에 빈곤과 이와 연계된 환경 그리고 질병과의 연관인 비르효의 사회학적 분석 방법은 창의적이라고 할 만큼 획기적인 발견이었다. 그가 갖는 병리학적 업적, 그리고 질병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은 국가 제도에 대한 개선까지 이어지고, 국가 정책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으로 사회의학을 통한 보건의료 발전에 발자취를 남긴다.

지금은 믿어지지 않겠지만 당시 베를린 사람들은 냄새로 다른 도시에서 온 사람들과 구분이 될 정도였다고 한다.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오물과 쓰레기 처리가 한계에 도달하자 도시에서 나오는 모든 쓰레기를 강에 버렸다고 한다. 당시 유럽에서 통용되던 말 중 ‘밤의 여자’는 베를린에서 오물이나 쓰레기를 모아 수레나 지게로 버리는 직업에 종사하는 여자를 의미했으며, 그 냄새가 지독해 강 주변 거주민들은 창문을 닫고 코를 막을 정도였다고 한다. 도시의 상태가 이 정도니 온갖 악취가 도시에 가득했고 베를린 거주민의 경우 항상 그 악취가 몸에 밴 상태로 생활을 하다 보니 구별이 됐을 정도였다고 한다.

비르효는 이와 같은 환경이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통찰을 가지고, 환경 개선을 위해 정부가 오물로 가득한 강에 투자할 것을 주장했다. 세금을 추가로 부담해야 하는 이해 당사자들의 반대도 있었으나 법제화에 성공했다. 물론 이 혜택은 모두에게 돌아가는 일이었지만 환경에 대한 인식이 낮았던 당시의 상황에서는 혁명적인 발상의 전환이었다.

비르효가 살던 시기는 혼란의 격변기였다. 의사의 전문성에 대한 권익에 힘을 쏟으며 그가 주장한 비장한 신념의 하나는 지금까지 모든 이들을 설레게 한다. “의사들은 가난한 자들을 대변하는 옹호자이며 사회적인 문제들의 상당 부분은 의사들의 책임에 있다”라는 주장이다.

그렇다고 그가 좌파적인 계급 사관을 가진 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우파적 신념의 소유자였다. 봉건적 가치에 반대 태도를 보였지만, 특정 계층의 대변인은 아니었다. 의사라는 전문지식을 가진 사회적 지식인으로서 지향해야 하는 방향을 기술한 것이다. 동정에 기반한 시혜적 입장이 아닌 인간에 대한 그의 가치가 반영됐다. 그는 자기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평생을 몸 바쳐 실천하고 노력했다. 후대의 우리가 그를 기리고 존경해야 하는 이유는 그가 가진 사상이 아닌 인간에 대한 소중함과 끊임없는 실천이다.

이 책의 난해함이 있다면 저자 이안 맥니리(Ian F. McNeely)의 논문이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는 서문을 통해 1992년 정치적 이념으로 자유주의가 역사적 전환의 정점에 있을 때 인간이 가진 보편적 가치를 지키기 위한 질병, 공중보건, 사회정의가 어떻게 평가받을지를 고민했다고 한다. 비록 공산주의가 몰락하고 자본주의가 주류 이념으로 남았다고 할지라도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사회 지식인층의 역할에 대한 역사적 반추를 통해 정의에 대한 실천을 환기하고자 했을 것이다.

"의학은 사회과학이며, 정치는 거대한 규모의 의학과 다르지 않다"라는 그의 말이 주는 무게는 오늘날 더욱 깊다. 특히 그가 자유주의적 사상을 가지고 있어 마음에 더 와닿는다. 의학과 과학이 결국 지향해야 하는 대상과 목적은 사람에 대한 사랑일 것이며, 제도와 환경의 변화를 이뤄내야 하는 것도 우리의 몫일 것이다. 4차산업혁명으로 인한 기술의 발달과 이로 인한 사회적 논쟁들의 종착점은 결국 사람에 대한 사랑이며 약자에 대한 우선적 배려여야 할 것이다. 역자인 신영전 교수가 이 말을 그의 사무실 앞에 걸었던 것처럼 이는 우리가 항상 가슴에 담아야 할 가치와 실천이다.

저자 이안 맥니리는 역사학자로서 미국 오레곤 대학교의 독일·스칸디나비아 학과 주임교수다. 독일과 유럽사를 전공했고 독일 시민사회와 정치사 연구를 하고 있다. 저서로는 ‘거대한 규모의 의학과’, ‘글쓰기의 해방’ 등이 있다. 역자는 의학과 보건학을 전공하고 한양대에서 예방의학교실 교수와 건강사회연구소장을 맡고 있는 신영전 교수와 고려대학교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하고 사회갈등연구소에서 연구원을 역임했던 서지은님이 수고했다. 2019년 9월 23일 건강미디어협동조합에서 책을 펴냈다.

[기고자 소개]

이태윤
자유와 방임을 동경하고 꾸준한 독서가 아니면 지능이 떨어진다고 믿는 소시민이며 소설과 시에 난독증을 보이는 결벽주의자

키워드

#N
저작권자 © 의료기기뉴스라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