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아이티, 보편사 - 수전 벅모스 지음, 김성호 옮김

헤겔, 아이티, 보편사

제목만큼이나 난해한 내용을 담고 있다. 헤겔과 아이티라는 국가 그리고 보편사는 우리에게 익숙지 않는 단어의 조합 일 수 있다. 하지만 이 세 단어를 분리시킨다면 사실 그리 낯이 설지 않은 단어다.

우리는 누구나 권력에 대한 욕구를 가진다. 권력이란 남이 자기 뜻대로 행동하게 하는 보이지 않는 힘이다. 고대 노예제에 주인의 뜻에 따르는 노예의 입장에서 명령에 대한 거부는 곧 죽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 노예제가 없어진 구체적 사건은 무엇이었을까? 그 답이 이 책에 존재한다.

아이티란 나라에 대하여 우리는 많은 것을 알지 못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나라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미국 다음으로 두 번째로 독립하였고, 노예제 폐지를 법령화한 최초의 북아메리카 국가이다. 초기 에스파냐의 식민지로 시작하여 프랑스와 스페인의 경쟁적 식민지 침탈을 겪는 역사적 과정을 겪었지만 종국에는 프랑스령 생도맹그라고 하는 식민지가 된다.

마침 이때 프랑스에서는 혁명의 기운으로 인권선언 등이 선포되자 아이티의 유색인종 연합은 프랑스와 싸워 독립을 쟁취하며 프랑스 감독관으로 하여금 아이티에서의 노예제를 폐지를 선언하게 한다. 이후 이 사태는 프랑스가 각 식민지에서 노예제 폐지를 선언하게 하는 시발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아이티에서 유색인종의 연합으로 인한 혁명이 일어났을 때 당시 유럽의 지식인들은 무엇을 했을까? 여기서 작가 수전 벅모스의 탁월한 상상력이 발휘되기 시작한다. 수전은 서로 연결되지 않은 두 가지 사건을 연결하며 헤겔을 지목한다. 헤겔이 그리 갈망하던 노예제가 폐지되는 역사의 변혁이 이루어지는 시점 그 논란의 철학적 중심에 있었던 헤겔이 몰랐을 것일까? 아니면 의도적 침묵으로 일관했던 것인가를 추론해 낸다.

당시 그 어떤 자료에도 헤겔은 프랑스령 생도밍그에서의 독립과 노예제 폐지에 대하여 이상하리 만큼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으며 근 2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는 사건으로 남아 있었을까?

수전은 이에 대하여 헤겔이 모르지 않았을 것이라는 답을 내린다. 사실 아이티의 노예해방혁명은 당시 전대미문의 역사적 사건이었기 때문에 유럽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 관심의 중심에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왜 헤겔은 이에 대하여 침묵했으며 많은 진보적 사상가들 또한 아무런 해석이나 분석을 내놓지 않았을까?

노예제의 붕괴가 가져올 기득권의 부담인가 아니면 정치적 성공에 한정되어 경제적 빈곤을 깨지 못한 불완전한 역사적 사실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전혀 예기치 않는 곳에서 너무 급작스럽게 이루어 졌던 준비되지 못한 사건이기 때문일까?

수전은 위의 여러 추론에 대한 답보다는 다른 시각의 논쟁점을 제시한다. 노예적 폐지라는 혁명적 사건이 일어났고 이를 계기로 역사 발전의 계기가 되었다면 이는 보편사로서의 가치를 지닐 수 있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원인에 대한 추론을 벗어나 미래지향적 방향성을 설정하는 것으로 논점을 옮겨간다. 분명 아이티의 독립과 노예폐지는 많은 지식인의 침묵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또한 이를 통한 세계사에서의 중요한 역사적 의미 또한 갖고 있다. 비록 현재 그 혁명이 아이티의 경제적 발전을 가져다주지 못하여 빈곤 속에 허덕이며 살고 있지만 당시 노예의 단결된 힘은 인권에 대한 폭발적 성장을 가져왔다.

세계사이던 아니면 작은 조직에 대한 발전사이던 헤겔의 해석을 빌리면 양적 발전은 질적 변환의 계기가 된다. 꽤 많은 사건들이 발생하고 그 속에서 중요해서 널리 알려져야 하는 아니면 중요하지만 알려 질 수 없는 사건들이 존재한다. 어떤 의도가 내재해 있든 간에 알려지지 못하는 중요한 사건은 의미면에서 보편사적 가치를 지닐 것이다.

진보적 철학자로서 저자는 역사에 묻혀있던 새로운 사실을 재조명한다, 그의 진보성이 다시 한 번 빛을 발하는 시점이다. 모두가 지나쳤던 사건을 누군가 재해석하고 그 본연의 의미를 파악해줄 때 진보의 속성이 발휘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저자 수전 벅-모스는 미국의 철학자 이자 사회학자이며 비판이론 연구자이면서, 동시에 발터 벤야민의『파사젠베르크Passagen-werk』에 대한 연구로 유명하다. 벤야민의 마지막 연구 주제는‘자본주의 도시의 문화적 구조’인데, 벅-모스는 이것을 영어로 번역하고, 이에 대한 해설서로『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The Dialectics of Seeing : Walter Benjamin and the Arcades Project』(1989)를 출간하였다. 그 외에도『부정변증법의 기원』(1977),『무릉도원과 파국 : 동서양의 대중적 유토피아 가로지르기』(2002),『테러 이후』(2003) 등의 저서가 있다. 독일 비판철학과 프랑크프르트학파 이론에 정통하다. 옮긴이는 서울여대 교수로 계신 김성호 님이며 2012년 (주)문학동네에서 출간하였다.

[기고자 소개]
이태윤
자유와 방임을 동경하고 꾸준한 독서가 아니면 지능이 떨어진다고 믿는 소시민이며 소설과 시에 난독증을 보이는 결벽주의자

키워드

#N
저작권자 © 의료기기뉴스라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